정미소의 역사
o 정미소가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전까지는 농가에서 수확한 벼를 수분함량 15% 내외로 건조하여 가마니에 담아 저장하였다가 필요할 때마다 물레방아, 연자방아, 디딜방아 등을 이용하여 도정, 적은 양은 집에서 절구를 이용해 직접 도정하였음.
o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의 정미업은 한국인 자본가가 진출한 대표적인 산업의 하나였으며, 당시 농민들은 소작료를 벼로 납부했고 상인들에게도 벼로 판매하였으며, 정미소는 단순히 임가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원료를 구입‧가공 판매하여 이윤을 얻는 정미 자본가로써 미곡상과 정미소를 동시에 운영함
o 발동기를 갖춘 정미소는 1898년 인천에 최초로 세워졌으며, 1930년대 후반에는 전국에 2천여 개가 운영되었음, 정미소는 클수록 유리했으며 벼 생산지에 자리를 잡거나 철도에서 멀지 않고 노동 인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설치하였으며, 운송비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음. 일제강점기의 한인 정미소는 일본의 거대자본과 경쟁에 밀리면서 차차 쇠락해 감
o 해방 이후 쌀의 대규모 반출이 중단되고 일본인 자본가가 사라지면서 마을 단위 소규모 정미업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발동기를 이용하여 기계방아를 돌리는 전문인력이 등장했고 이장 경력자나 마을 내 영향력 있는 인물이 기계를 도입하여 도정권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마을이 공동으로 기계방아를 이용한 사례도 있음
o 1960년대에 들어와 규모가 크고 현대화된 농협 도정공장이 생기면서 마을의 소규모 정미소는 위축되었으나 1966년 임도정공장은 25,328개에 달했음. 1970년대 중반 정부가 추곡 수매량을 늘리면서 농협의 양곡 도정 물량이 줄었으며 이에 따라 부실한 도정공장을 정리하여 결국 1980년 전국 도정공장은 20,928개로 5천여 개가 줄었음. 정부양곡 도정공장은 531개, 임도정공장은 20,397개였음
o 1980년대 들어 계속되는 농업인구의 감소, 농촌 노동력의 부족 등과 함께 양질미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곡의 건조에서 저장 및 도정까지 종합적인 시스템을 갖춘 미곡종합처리장(RPC)을 도입하게 되었음
o 1988년 최초로 기본설계를 완료하였고 1991년 당진 합덕농협과 의성 안계농협에 시범 설치하였으며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설치된 미곡종합처리장(RPC)는 2000년대 초 330개소가 넘었다가 소규모 RPC의 경영이 악화되면서 RPC간 통합을 추진하여 2017년 214개소, 2024년 현재 178개로 줄었음.
o 90년대 RPC를 가진 농협이 쌀 시장에 본격 진출하면서 산지 유통의 중심이었던 민간 RPC와 도정공장은 쇠락하여 2023년 약 3천 개소로 줄었으며, 그 취급량도 현저히 감소하였음